[서평] 징비록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조선의 고위관리 중 한명이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전쟁에서 임금과 백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징계하고, 이를 경계하기 위해 징비록을 집필했다. 따라서 징비록에는 당시 사대부들의 어리석음, 부패한 탐관오리, 왜군들에 의한 끔찍한 조선인 학살 등이 가감없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은 썩어 문드러져 나라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15세기 말부터 조선에서는 정치의 실적을 가진 '훈척'과 중앙 정계로 진출하던 '사림'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가 발생했다. 과도한 세금징수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크게 피폐해졌으며, 병농일치 원칙이 붕괴되고 지휘관들이 대가를 받고 군사의 입번을 면제해주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력 역시 약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토지 조사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 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는 다이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 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사게되었다. 게다가 삼포왜란, 닝보의 난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내부 갈등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 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 변혁'을 구상하게 되었다.

왜군들이 부산포에서 집결했다. 왜군은 자신들은 조선침략을 위해 온것이 아니며 명나라를 치기위해 왔으니 길을 열어달라했다. 당연히 조선은 이를 거부했고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그날 부산포가 함락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까지 왜군에게 넘어가고 만다.

명나라의 지원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의병, 그리고 이순신의 활약으로 왜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끔찍한 전쟁 이후에도 조선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명나라를 섬기는 지독한 '사대주의' 나라였다. 임진왜란의 산 증인 류성룡 역시 정치싸움에 의해 직위를 빼앗긴걸 보면 조선의 미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참고 문헌>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6646&cid=41755&categoryId=4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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