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기독교의 동서 분열 -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종교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한번 정리할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을 말한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유는 교리, 정치,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우상 숭배 논쟁, 삼위일체 논쟁, 교권싸움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입에 못이겨 일찍 망하게 되었고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오랫동안 건재했다.
<그림1, 동서로 분리된 로마 제국의 영토 모습>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리는 -  '동서방 교회 대분열' -  당시 양측의 갈등은 매우 해묵은 문제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기 전인 4세기 경부터 기독교의 주요 교구는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등 제국 내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섯 개가 있었다. 로마만 서방에 있고 나머지 4개는 동쪽에 있는 동방 교회였다. 동부 지역은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과 가까운 만큼 기독교 세력이 서방에 비해 훨씬 컸다. 그런데도 로마 교구는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예수의 첫째 제자인 베드로가 순교한 점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다른 교구에 비해 우월권을 주장했다. 또한 로마 교회 주교는 다른 교구의 주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점차 교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84년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을 하면서 동서 교회의 반목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진 동서교회는 11세기 중반에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054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던 로마교회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교주에게 파문장을 던지는 돌발적인 행동을 벌이고 만것이다. 그리고는 이틀 뒤 황제의 허가를 얻어 황제가 선사한 선물을 지닌채 귀환했다. 여기에 맞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로마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고 정통 기독교인 동방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로마 기독교의 분열이 공식화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동서 교회은 서로의 파문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곧 원만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결되기 전에 동로마에 여러가지 시련이 닥치는 바람에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면서 동서 교회 분리가 영구화되고 말았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싸우는 사이 외부의 여러 적들이 동로마 영토로 쳐들어오면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분열이 생기게 되었을까.

우상 숭배 논쟁
초기에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어떤 성상도 허락하지 않았던 서로마는 외세의 침략으로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로인해 서로마는 게르만 민족의 종교 풍습인 우상 숭배를 받아들여 게르만 세력을 포섭하는 선택을 하였다. 이는 동방 교회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

삼위 일체 논쟁, 혹은 단성론
서방교회는 신성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예수는 단지 전달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단성론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교권 싸움
바로 교권싸움이다.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권이 점점 강해지면서 세계를 압도하였고 이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동로마 대 주교가 굴복하지 않고 결국 분립하게 된것이다. 두 교권은 교회의 수위권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교리 문제(단성론이나 성상 숭배 문제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대립하게 되었고 11세기 중반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성상 숭배
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 측에서는 무지한 야만인들에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치기 위해서 성상숭배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여 비잔틴 제국 측의 성상 숭배 명령을 묵살하였다. 결국 1054년 7월 16일에 동서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게 되었다.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었다.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기 비난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에 화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사실상 초기 서로마는 명백이 끊겼고, 신성 로마제국이란 다른 이름이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유럽에서 크게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정교,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교로 나뉘어졌다. 이 후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사회에서 고립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동서분열' 논쟁은 11세기에 단일 기독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서로마)가 이탈했다는 시각과, 교황과의 일치로부터 동방 정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참고 문헌>
-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
-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4%9C_%EB%B6%84%EC%97%B4
-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 곽영완
- 그림 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lee96&logNo=220486921714&parentCategoryNo=&categoryNo=22&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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