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최진석




요즘 인문학 강의가 유행되고 있다. 아니 오래전부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 나는 인문학은 물론 인문학 강의에도 관심이 전혀 없던 '보통 사람' 이었다. 단지 나에게 닥친 일차원적인 일(Task)를 처리하는데 급급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많은 유명인이 혹은 주위에서 책을 읽으라고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고 지금도 바뀌고 있다. 내가 책을 읽게된 계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다양한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인문학 강의' 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진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가 자기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자기를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생에서 이루어야할 가장 중요한 배움이 아닐까 싶다.

감명깊었던 내용,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반면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항상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할때는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고립시킨다. 나는 어느쪽일까.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다면 왜 나는 기준을 외부에 두게 되는 걸까. 내가 하는 것이 어떠한 기준에 미달되서 라고 대답할 경우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일상의 공간은 이삿짐처럼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살림살이도 이삿짐 골목길 ( 누구나 다니는 골목길 )에 놓이면 초라하게 보인다. 즉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여도 내면 자체는 굉장히 초라하다는 뜻이다."




질문하는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본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자기가 한번도 기준의 생산자,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 외부의 기준을 자기 기준으로 삼아서 사는데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기준의 처음은 있다. 그 기준은 엉뚱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반면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항상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할때는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고립시킨다. 나는 어느쪽일까.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다면 왜 나는 기준을 외부에 두게 되는 걸까. 내가 하는 것이 어떠한 기준에 미달되서 라고 대답할 경우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일상의 공간은 이삿짐처럼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살림살이도 이삿짐 골목길 ( 누구나 다니는 골목길 )에 놓이면 초라하게 보인다. 즉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여도 내면 자체는 굉장히 초라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삼으며, '완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사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는 서양에서는 니체, 동양에서는 장자가 될 수 있다.

장자의 천도편에 유명한 윤편사이의 이야기가 있다.

윤편 : 책에는 무엇이 쓰여져 있습니까?
환공 제나라 왕 : 성인의 말씀이 써져있다

윤편 :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왕 : 아니지 죽었지.

윤편 :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있는 그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 * 술찌꺼기 - 조백
왕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저는 수레바퀴 깎는 일만 평생 해왔습니다.
이러한 비법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손의 감각입니다. 심지어 제 아들에게도 수레바퀴 깎는 기술을 전수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제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윤편의 가르침은 "성인의 말은 생산된 그 순간까지만 진리였고,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 가르침은 찌꺼기 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혁신을 강조하는 회사.

혁신을 위해 많은 전문가를 초빙

1년~2년하고 있다 , 3년째가보면 혁신이 되어있지 않다

혁신에 대해 토론하고, 이론에 참여한것을 내가 혁신한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수 있다.

성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성인이 될것같이 착각할 수 있다.

성인의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성인과 동일시 하는 착각할 수 있다.

성인의 말은 성인이 한 사건의 결과물이다.

혁신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혁신을 하는것, 혁신을 담당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왜 이것을 알면서 아는 것으로 끝이나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입니까, 일상입니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일상입니까.

일상의 세계에는 '내'가 있습니다.

보편적 이념을 수행하는 데는 적극적이고, 목숨도 걸지만, 내가 직접살고 있는 일상을 관리하는 데는 소홀한가
왜 '우리'로 하는 데는 열심인데, '나'사는데는 소홀한가



이것은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이론이 없는것이 아니라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힘이 없는 것이다.

자기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 이념에 해박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나만의 힘 나만의 욕망,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가. 그것을 사건을 발동시킬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사는지 못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 "장자 이야기" 읽어보기

제사의 제물로 올라갈 소를 못했습니까?

제물이 될 소를 몇년 동안 잘 먹이고 살 찌운다. "내가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사람들이 깨끝이 씻기고, 비단옷을 입히고, 간다.
태묘에 가까워지자 눈치챈 소
"아 이제 나는 희생되는구나"

"내가 소로 태어나지 말걸
차라리 보잘 것 없는 돼지로 태어날걸"

뒤듲게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아가시오,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택하지,
천하에 얽매이는 삶은 택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것과, 천하를 대립시키고 있다

나는 천하를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겠다. 나의 즐거움을 따르겠다

중국계 도가 전통
개인과 천하를 대비시키는 비교한다

양주라는 도가 철학자가 있다

내가 정강이의 털 한올 뽑아서 천하가 이롭다 하더라도, 정강이 털을 뽑지 않겠다.

양주는 이기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

양주, 개인의 자발성에서 나온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약하다.

개인들이 자발적인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꾼다.

노자라는 철학자는
나를 천하마늠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긴다.
나를 천하와 동급화

즉, 이념이 지배하는 틀에 같힌 나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함석헌이라는 독특한 철학자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야기한 함석헌
세계 최강
강력한 학생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은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했던 학생운동 학생들
학생운동가 숫자만큼, 우리 사회는 정의와 도덕의 질이 높아졌는가.
함석헌 눈에는 그렇지 않다.

혁명하는 개별자들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고있다.

혁명 이념을 수행만 했지, 혁명가가 혁명되지 않은채 혁명을 했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자발성, 독립성, 주체성, 주체력 이런것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위 안에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혁과, 발전과, 진정한 품격에 직접적으로 기원이 된다.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것은, 자쾌 - 스스로 즐기는것, = 자유

자유는 전체라는 집단에 대항하는 나의 활동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 생명력을 근원초로 해서 내 삶을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놀고 있는 자기는 일상에 있는자기 인가.

모든 삶의 모든 활동은을 운동하고 있다

운동이란
경계가 계속 중첩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운동은 한번도 하나의 형식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독립적 자발성의 활동을 중시한다는 말은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경계에 서겟다 이런내용이다.

모든 이론 모든 개념은, 한쪽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관념도 대립적은 상태를 동시에 포용할 수 없다.

내가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내적자발성의 실천자가 되겠다

내가 이념속에 고정되지 않고 사건의 담당자가 되겠다. 라는 말은 경계에 서겠다 라는 내용이다.

무든 이념은 하나의 가치에 집중되어 있고, 믿음, 수행되게 하다.

이러한 이념이 하나의 가치속에 운동하는 개별자를 속박하려고 한다.

이념을 뚫꼬서 자발적 생명력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 윤동의 경게에 선 사람이다.

경계에 서 있는 자기가 움직이는 내적 활동성을 이것은 욕망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상식상의 이성은
비율을 따지고 계산하고, 집단을 관리한다.

경계에 서서 욕망의 활동성에 자기를 맡길 때 강해진다.

왜 경계를 품은 사람은 강한가?
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경계를 모두 품은 사람은 강할까.
유연하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 사람은 그 이념에 속박하게 된다.

정지 있는 이념과 신념에 갖힌 사람은 경직한다.

가치 기준을 자기가 생생하지 못하고 정지한 이념을 가치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사람들은 1. 항상 왜소한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고, 2. 이념을 잘 지키느냐로 자신의 지위와 가치를 결정


살아있는 것유연하다, 죽어 있는 것들은 뻣뻣하다

운동을 내적으로 수용 여부 & 운동과 자신의 일체 여부가
자기가 주인이 되느냐 vs
 자기를 외부에서 지배하는 이념을 자기 주인이게 만드냐 를 결정하게 된다.

생각해보자
내가 이 세계와 관계할 때, 내가 생산한 기준으로 관계(살아가는가)하는가
아니면 학습된 기준으로 관계(살아가는가)하는가?

언제 내가 기준의 생산자로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 내가 언제 나로 살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윤리적이고 주체적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보편적 이념이 내면화된 것을 자기 기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주체는 세계 운동과 일치하는 주체고 세계운동과 일치하는 이 주체는 경계를 포용하는 주체다.

경계를 포용한다는 것이 무슨뜻인가...

책은 누군가가 쓴 것이다. 여러분들이 읽은 그것은 누군가가 써놓은 것이다.

독서는 읽기와 쓰기가 교차되어 있다.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쓸 수 있기 위해,
책을 쓴다, 글을 쓴다, 표현한다

말을 듣는 이유, 말을 하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의문, 남이 말하는 걸 듣다가, 내가 말하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누군가 쓴 책을 읽기만 하다가. 내가 걸어야 될 길, 내가 쓰는 길은 잃어버리지는 않은지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공부하는 목적은 ?

우리가 공부를 하는 누군가가 가르켜놓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1.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2. 정해진것은 학습하는데 제한된 것이 아니라
3. 정해진 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번은 정해보는 것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60세에도 배우는 재미에 푹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창의적으로 되기 어렵겠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배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 입니가.

이제 그만 배우세요. 지금은 자기를 표현하세요.

배우는 것은 아름다는 일이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기푠의 장애를 갖게 된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의 표현을 습득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것을 습득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만족할것인가.

배우는 것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한테 표현의 동력을 못만드는 배움은

표현의 동력을 못 만드는 배움은 경계를 모두 품는게 아니다.

배울때는 표현의 동력이 필요

자기활동은 읽기와 쓰기 사이에 있어야 하고
배우기와 표현하기 사이에 있어야 하고
듣기 말하기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 사이에 있을때 인간은 순수해지지 않고 점잔해지지 않고 거칠어진다.
짐승의 눈빛을 회복한다.

삶 전체를 배우는데 바치고, 누가 말하는것을 정리하는데 바치고, 듣는데 바친다면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경계에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안에는 경계성을 회복하는 야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내가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 서 읽어야 한다.

경계에 서있다는 것은 한쪽에 수동적으로 갇힌게 아니라, 경계에서 자기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살아있다고 한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용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고

삶의 궁극적인 동력의 출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침해하는 어떤것에도 도전하는 것이다,.


자의 주체성 나의 존재성을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죽기전까지 해서는 안될 두가지,
1. 충고하지
2. 남의 충고 듣기


충고가 제일 듣기 싫은 최진석 교수

그대신 최진석교수도 누구한테 절대 충고하지 않는다.

친구를 돌보는 것보다 나를 돌보는게 더 바빠요.

충고 들었다고 자기 갈길을 이리저리 바꾸지 맙시다.

한번 자기 멋대로 살아봅시다.
경계에서서 내가 내 주인으로 살때 느끼는 자족감 느껴보자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될 두가지
1.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2.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 자기를 이삿짐같이 생각하기 때문임.
1. 내적 자발성에서 생산되는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2. 자기 밖에 이미생산된 기준에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나.
스스로를 비하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이념. 기준은 조백(찌꺼기 이다)

찌꺼기에 빗대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지해하는 보편적 이념 기준은 시간이 지나서 가공물이다.

욕망의 담당자로 경계에 서있는 주체로 자신을 돌아보자
그 자신은 여러분들 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자유롭다

이렇게 강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자기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소홀히 관리되지 않은 자기는 자기한테 가장 존엄한 존재이다.
존재는 존엄한 활동을한다.
뇌물이 거절할 수 있게 된다.

윤리 규정을 지키는 자기는 뇌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자기 존엄을 지키는 주체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

윤리적 힘을 가진 존재로 재탄생

여러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고 자유롭고 강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확인처가 모든 창조적 동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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