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철산도서관 강연에 참석하였다. 주제는 너무너무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밀의 어린시절부터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 그리고 그의 대표작 '자유론'에 대해 흥미롭게 강의를 해준신 오인영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밀은 어린시절 아버지에 의해 '슈퍼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당시의 유명인인 제러미 벤담이나 데이비드 리카도와 토론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청년시절에는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경우, 나는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합산총량이 최대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라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는 공리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슈퍼 초 엘리트' 밀은 해리엣 테일러라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합법적으로 영혼의 동반자로서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8년 후 해리엇이 폐충혈에 걸려 죽게되면서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밀의 저서 '자유론'은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어느 한 사람의 자유에 정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 보호를 위한 경우밖에 없다' 라는 아주 단순한 하나의 원칙에 대한 정교화-상술-예증이다. 밀은 이 책에서 개인의 자유는, 이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자유론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존재이고, 따라서 어느 한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자신 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밀은 생각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하는 이유는 물론이고,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삶을 꾸려나갈 자유가 꼭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를, 인간은 무엇이 진리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에서 찾은 것이다.
밀에 의하면, 자신이 절대 진리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자만에서 벗어나야만 자기 발전이 가능하고 사회적 관용이 작동할 수 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 곳에서만 개인의 발전도 사회의 진보가 가능하다. 이런 견지에서 밀은 진리의 다면성(many-sideness)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밀은 어떤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모든 사람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유론'에서 토론과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 가운데 가장 완고하다고 할 수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도 새로운 성자를 인정하는 시성식에서 조차 "악마의 변(devil's advocate)을 인내하며 듣는다는 사실을 예시하기도 하였다.
내 기준에서 봤을때 자유론은 분명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한번쯤은 꼭 읽어보아야 할 명저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밀은 비록 공인된 의견이 옳은 뿐만 아니라 순수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력하고 진지하게 시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의견이나 진리는 그것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편견의 형태로서 간직되어 그것 자체의 합리적 근거는 거의 이해되지도, 느껴지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밀의 주장에 따라 조만간 자유론을 눈으로 읽고 분석하고 판별해보아야 겠다.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훈련을 또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이나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다른 사람이 믿으니까 자기도 믿는 경우도 그렇지만, 어떤 일을 다른 사람이 따라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튼튼해질 수 없다.
인간은 개성에 맞게 자신을 계발하고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 존재이다. "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을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 라고 본다.
- '자유론' 중에서
지난 달에 들었던 강연에 대해 이제야 정리를 하게 되었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아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다.
마크 트웨인은 헬리 혜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헬리 혜성이 나타난 1835년에 태어나 이 혜성이 다시 모습을 보인 1910년 까지 살았다. 또한 문자 그대로 혜성같은 존재의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미국 문단에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미국만의 독특한 소설세계를 처음으로 선보인 '혜성' 같은 작가였다. 당시 미국지식은 유럽의 문학스타일을 지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 토박이의 거칠고 밝은 구어체의 표현들을 펼쳐보였다. 남부 서민들의 속어와 방언들을 과감하게 담아내는 획기적인 문장들은 미국문학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허클베리핀과 톰소여의 모험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은 미시시피 강이다. 미시시피 강은 어른 세계의 어리석음과 거짓으로 채워진 문명세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제공한다. 또한 윤리를 넘어선 자유와 모험을 제공하면서 주인공의 삶을 건강하면서 성숙해지는 방향으로 인도해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내게 한달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문학 콘서트'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를 듣는것 순간, 나는 굉장히 행복하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서 삶을 배우다' 이다.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잘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셰익스피어의 저서를 읽어본 적은 없다. 시간내어 꼭 읽어봐야겠다. 셰익스피어가 서거한지 올해로 400주년이 된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자신이 죽은 뒤 400년이 지나고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행사까지 개최할지 셰익스피어는 상상이나 했을까?
셰익스피어에 관해서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유래없는 대작을 쓴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셰익스피어 자신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Francis Bacon, Henry Neville, Edward de Vere 등이라는 설이 있다. 강사님은 심증적으로 Edwad de Vere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신다고 한다.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영국을 다스리던 시절에 극작가로 활동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을 통치하는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사회가 굉장히 안정되고 국력이 강했지만 제임스 치하 때는 이전 보다 불안하고 암울했다. 재미있는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정확히 반영되었다. 엘리자베스 치세때는 즐거운 희극을 썼지만, 제임스 1세 시절에는 그 유명한 4대 비극이 모두 쓰여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영국르네상스' 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에드먼드 스펜서,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등장하였다. 또한 이때 세네카,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의 많은 고전이 영역되었는데 셰익스피어도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성격비극'이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과는 다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운명 비극이다. 타고난 운명에 의해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4대 비극은 고귀한 신분의 주인공들이 저마다 비극적 결함(tragic flaw)를 지니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주인공 혼자만의 파멸이 아닌 주위의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파멸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두고 후대 비평가는 권선징악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생전 이런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연극의 목적은 세상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매우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시고 재미있게 셰익스피어에 대해 설명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뜬금없지만 강의 중 강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고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도봉구 방학동에 삽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어요."
나는 정도전에 대해 고려말 조선을 건국한 공신 중 한명이라고 밖에 알고 있지 않았었다. (국사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노비출신이었다는 것과, 전적으로 백성중심의 정책을 펼쳤다는 것 역시 몰랐던 사실이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둘도 없는 친구였으나 나중에는 원수가 되는 슬픈 역사도 몰랐다. (예전에 고등학교때 배웠었는데 다 잊어먹었다...)
정도전은 급진정책을 펼쳤었는데 그 중 몇몇은 오늘날 현대에서도 쉽게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어 평민과 귀족간에 차별없이 공평하게 출세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출발선이 같게 하자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전국에 무료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능력있는 사람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운영 되었었다고 한다.
13~4세기 고려는 의상이나 관습에 있어서 몽골(원나라)의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몽골의 국력이 약화됨에 따라 고려는 개혁이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있는 것이다.
강의 중 기억나는 내용은 15세기의 우리나라의 상황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얘기가 나왔는지는 잘모르겠는다. 15세기는 세종대왕이 조선을 다스릴때이다. 이때 조선이 한글을 제창하고 장영실에 의해 많은 발전을 하게되었는데, 이 시기가 여느 유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농문 교수의 저서 '몰입' 을 구매해서 읽어보았을때의 나의 느낌은 '글쎄요' 였다. 대학교 교수인 저자가 설명해주는 몰입을 위한 방법들은 보통사람들이 따라하고 습득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어렵다고 생각이 된다. 한편으로는 굳이 저렇게 까지 하면서 몰입을 하면서 살아야되? 세상 너무 피곤하게 사는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책을 반정도 보고 책을 덮었다. 다시 볼 계획은 없다. (책이 좋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평범한 나로서는 저자가 설명하는 몰입의 법칙을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몰입이 정말로 필요한 어느 날에 이 책 그리고 강연을 다시 찾아볼 일이 있기를.
- 강의 메모 -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는 '가장 비참한 삶' 이라는 생각이 듬
그때 부터 어떻게 살아야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까
자신의 능력을 모두 쏟지 못한다면 '후회하는 삶' 이다.
쉬지 않고 두뇌를 활용하는 황농문 교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목숨걸고 하라
몰입을 통해 나와 맞는 일인지 확인
몰입할 이유 x -> 무료해지는 삶
몰입의 쾌감을 느끼기 위해 위기상황을 자초하는 얼룩말
의도적으로 만든 몰입 상태 '암벽등반' -> 위기감으로 유도되는 몰입
운동을 통한 몰입 ->> 이런것들은 능동적인 몰입
즉 뇌가 어떠한 활동에 대해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몰입이 가능하다.
물입의 원리? -> 뇌를 속여라 .
뇌를 속인 흔한 상태-> 슬픈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것, 실제상황이 아님
관심이 가는 철학자 중에 한명인데, 참 어렵다. 외모에서 부터 느껴지는 까칠함부터 지레 겁먹게 된다.
니체의 삶은 굉장히 고통이었다고 한다. 지독한 두통에 평생 시달렸던 니체는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을 것이다. 머리가 맑아지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 집중적으로 썼던 책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니체의 저작들이다.
<강의 메모>
니체가 허무주의를 심봉(?)한다고 한다. 솔직히 아직 니체의 책을 한번도 읽진 않았지만 꼭 시간내서 읽고싶다.
허무주의가 일상이 된 시대 니체는 과연 어떤말을 던져줄까? 여기서 ' '허무주의' 의 뜻을 찾아보았다.
니힐리즘(nihilism)은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로 어원은 라틴어의 '무(無)’ 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다.
니힐리즘의 원래 의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허무주의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전복의 철학자, 니체는 누구인가?
백신이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뛰어난 지적인 병균
마키아벨리보다 훨씬 더 나쁜 악한 책 한 권을 쓸 것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사악한 시선"이자, 나의 사악한 귀 이다.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 의문을 제기한다.
내 말을 믿어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아전을 추구하는 곳은 지적 발전도 이우
"진리를 알고싶다면, 계속 질문하라"
'젊은이들의 영혼을 유혹한 죄로 사형 선거를 받은 소크라테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머리로 하는 철학' 과 '가슴으로하는 철학' 으로 구분된다. 니체는 철저히 '가슴으로 하는 철학'에 해당한다. 머리로하는 철학자는 거의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슴으로 하는 철학자는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요약>
1889년 1월 3일
니체의 삶을 정말 진심으로 들여보아야 니체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44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79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남
1889년 토리노에서 광기의 발작을 일으킴
마부가 말을 때리고 있다. 니체는 맨발로 뛰어나와 맨발로 말을 가로막고.
말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광끼의 발작을 일으킨다. 이것이 프리드리히 니체가 미치게 된 계기이다.
기독교적인 도덕, 기독교적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했던, 니체가 짐승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900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사망
"아버지는 예리한 정신력과 따듯한 감성을 가진 완전무결한 시골의 성직자였다. " - 니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왜 신을 부정했나?
아버지의 36살에 죽음 , 니체가 다섯살때.
요즘 인문학 강의가 유행되고 있다. 아니 오래전부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 나는 인문학은 물론 인문학 강의에도 관심이 전혀 없던 '보통 사람' 이었다. 단지 나에게 닥친 일차원적인 일(Task)를 처리하는데 급급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많은 유명인이 혹은 주위에서 책을 읽으라고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고 지금도 바뀌고 있다. 내가 책을 읽게된 계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다양한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인문학 강의' 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진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가 자기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자기를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생에서 이루어야할 가장 중요한 배움이 아닐까 싶다.
감명깊었던 내용,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반면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항상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할때는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고립시킨다. 나는 어느쪽일까.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다면 왜 나는 기준을 외부에 두게 되는 걸까. 내가 하는 것이 어떠한 기준에 미달되서 라고 대답할 경우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일상의 공간은 이삿짐처럼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살림살이도 이삿짐 골목길 ( 누구나 다니는 골목길 )에 놓이면 초라하게 보인다. 즉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여도 내면 자체는 굉장히 초라하다는 뜻이다."
질문하는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본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자기가 한번도 기준의 생산자,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 외부의 기준을 자기 기준으로 삼아서 사는데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기준의 처음은 있다. 그 기준은 엉뚱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반면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항상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를 지배할때는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고립시킨다. 나는 어느쪽일까.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다면 왜 나는 기준을 외부에 두게 되는 걸까. 내가 하는 것이 어떠한 기준에 미달되서 라고 대답할 경우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일상의 공간은 이삿짐처럼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살림살이도 이삿짐 골목길 ( 누구나 다니는 골목길 )에 놓이면 초라하게 보인다. 즉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여도 내면 자체는 굉장히 초라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삼으며, '완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사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는 서양에서는 니체, 동양에서는 장자가 될 수 있다.
장자의 천도편에 유명한 윤편사이의 이야기가 있다.
윤편 : 책에는 무엇이 쓰여져 있습니까? 환공 제나라 왕 : 성인의 말씀이 써져있다 윤편 :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왕 : 아니지 죽었지. 윤편 :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있는 그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 * 술찌꺼기 - 조백 왕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저는 수레바퀴 깎는 일만 평생 해왔습니다. 이러한 비법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손의 감각입니다. 심지어 제 아들에게도 수레바퀴 깎는 기술을 전수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제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윤편의 가르침은 "성인의 말은 생산된 그 순간까지만 진리였고,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 가르침은 찌꺼기 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혁신을 강조하는 회사.
혁신을 위해 많은 전문가를 초빙
1년~2년하고 있다 , 3년째가보면 혁신이 되어있지 않다
혁신에 대해 토론하고, 이론에 참여한것을 내가 혁신한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수 있다.
성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성인이 될것같이 착각할 수 있다.
성인의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성인과 동일시 하는 착각할 수 있다.
성인의 말은 성인이 한 사건의 결과물이다.
혁신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혁신을 하는것, 혁신을 담당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왜 이것을 알면서 아는 것으로 끝이나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입니까, 일상입니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일상입니까.
일상의 세계에는 '내'가 있습니다.
보편적 이념을 수행하는 데는 적극적이고, 목숨도 걸지만, 내가 직접살고 있는 일상을 관리하는 데는 소홀한가 왜 '우리'로 하는 데는 열심인데, '나'사는데는 소홀한가
이것은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이론이 없는것이 아니라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힘이 없는 것이다.
자기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 이념에 해박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나만의 힘 나만의 욕망,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가. 그것을 사건을 발동시킬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사는지 못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 "장자 이야기" 읽어보기
제사의 제물로 올라갈 소를 못했습니까?
제물이 될 소를 몇년 동안 잘 먹이고 살 찌운다. "내가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사람들이 깨끝이 씻기고, 비단옷을 입히고, 간다.
태묘에 가까워지자 눈치챈 소
"아 이제 나는 희생되는구나"
"내가 소로 태어나지 말걸
차라리 보잘 것 없는 돼지로 태어날걸"
뒤듲게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아가시오,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택하지,
천하에 얽매이는 삶은 택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것과, 천하를 대립시키고 있다
나는 천하를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겠다. 나의 즐거움을 따르겠다
중국계 도가 전통
개인과 천하를 대비시키는 비교한다
양주라는 도가 철학자가 있다
내가 정강이의 털 한올 뽑아서 천하가 이롭다 하더라도, 정강이 털을 뽑지 않겠다.
양주는 이기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
양주, 개인의 자발성에서 나온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약하다.
개인들이 자발적인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꾼다.
노자라는 철학자는
나를 천하마늠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긴다.
나를 천하와 동급화
즉, 이념이 지배하는 틀에 같힌 나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함석헌이라는 독특한 철학자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야기한 함석헌
세계 최강
강력한 학생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은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했던 학생운동 학생들
학생운동가 숫자만큼, 우리 사회는 정의와 도덕의 질이 높아졌는가.
함석헌 눈에는 그렇지 않다.
혁명하는 개별자들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고있다.
혁명 이념을 수행만 했지, 혁명가가 혁명되지 않은채 혁명을 했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자발성, 독립성, 주체성, 주체력 이런것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위 안에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혁과, 발전과, 진정한 품격에 직접적으로 기원이 된다.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것은, 자쾌 - 스스로 즐기는것, = 자유
자유는 전체라는 집단에 대항하는 나의 활동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 생명력을 근원초로 해서 내 삶을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놀고 있는 자기는 일상에 있는자기 인가.
모든 삶의 모든 활동은을 운동하고 있다
운동이란
경계가 계속 중첩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운동은 한번도 하나의 형식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독립적 자발성의 활동을 중시한다는 말은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경계에 서겟다 이런내용이다.
모든 이론 모든 개념은, 한쪽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관념도 대립적은 상태를 동시에 포용할 수 없다.
내가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내적자발성의 실천자가 되겠다
내가 이념속에 고정되지 않고 사건의 담당자가 되겠다. 라는 말은 경계에 서겠다 라는 내용이다.
무든 이념은 하나의 가치에 집중되어 있고, 믿음, 수행되게 하다.
이러한 이념이 하나의 가치속에 운동하는 개별자를 속박하려고 한다.
이념을 뚫꼬서 자발적 생명력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 윤동의 경게에 선 사람이다.
경계에 서 있는 자기가 움직이는 내적 활동성을 이것은 욕망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상식상의 이성은
비율을 따지고 계산하고, 집단을 관리한다.
경계에 서서 욕망의 활동성에 자기를 맡길 때 강해진다.
왜 경계를 품은 사람은 강한가?
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경계를 모두 품은 사람은 강할까.
유연하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 사람은 그 이념에 속박하게 된다.
정지 있는 이념과 신념에 갖힌 사람은 경직한다.
가치 기준을 자기가 생생하지 못하고 정지한 이념을 가치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사람들은 1. 항상 왜소한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고, 2. 이념을 잘 지키느냐로 자신의 지위와 가치를 결정
살아있는 것유연하다, 죽어 있는 것들은 뻣뻣하다
운동을 내적으로 수용 여부 & 운동과 자신의 일체 여부가
자기가 주인이 되느냐 vs
자기를 외부에서 지배하는 이념을 자기 주인이게 만드냐 를 결정하게 된다.
생각해보자
내가 이 세계와 관계할 때, 내가 생산한 기준으로 관계(살아가는가)하는가
아니면 학습된 기준으로 관계(살아가는가)하는가?
언제 내가 기준의 생산자로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 내가 언제 나로 살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윤리적이고 주체적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보편적 이념이 내면화된 것을 자기 기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주체는 세계 운동과 일치하는 주체고 세계운동과 일치하는 이 주체는 경계를 포용하는 주체다.
경계를 포용한다는 것이 무슨뜻인가...
책은 누군가가 쓴 것이다. 여러분들이 읽은 그것은 누군가가 써놓은 것이다.
독서는 읽기와 쓰기가 교차되어 있다.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쓸 수 있기 위해,
책을 쓴다, 글을 쓴다, 표현한다
말을 듣는 이유, 말을 하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의문, 남이 말하는 걸 듣다가, 내가 말하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누군가 쓴 책을 읽기만 하다가. 내가 걸어야 될 길, 내가 쓰는 길은 잃어버리지는 않은지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공부하는 목적은 ?
우리가 공부를 하는 누군가가 가르켜놓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1.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2. 정해진것은 학습하는데 제한된 것이 아니라
3. 정해진 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번은 정해보는 것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60세에도 배우는 재미에 푹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창의적으로 되기 어렵겠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배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 입니가.
이제 그만 배우세요. 지금은 자기를 표현하세요.
배우는 것은 아름다는 일이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기푠의 장애를 갖게 된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의 표현을 습득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것을 습득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만족할것인가.
배우는 것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한테 표현의 동력을 못만드는 배움은
표현의 동력을 못 만드는 배움은 경계를 모두 품는게 아니다.
배울때는 표현의 동력이 필요
자기활동은 읽기와 쓰기 사이에 있어야 하고
배우기와 표현하기 사이에 있어야 하고
듣기 말하기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 사이에 있을때 인간은 순수해지지 않고 점잔해지지 않고 거칠어진다.
짐승의 눈빛을 회복한다.
삶 전체를 배우는데 바치고, 누가 말하는것을 정리하는데 바치고, 듣는데 바친다면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경계에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안에는 경계성을 회복하는 야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내가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 서 읽어야 한다.
경계에 서있다는 것은 한쪽에 수동적으로 갇힌게 아니라, 경계에서 자기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살아있다고 한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용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고
삶의 궁극적인 동력의 출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침해하는 어떤것에도 도전하는 것이다,.
자의 주체성 나의 존재성을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죽기전까지 해서는 안될 두가지,
1. 충고하지
2. 남의 충고 듣기
충고가 제일 듣기 싫은 최진석 교수
그대신 최진석교수도 누구한테 절대 충고하지 않는다.
친구를 돌보는 것보다 나를 돌보는게 더 바빠요.
충고 들었다고 자기 갈길을 이리저리 바꾸지 맙시다.
한번 자기 멋대로 살아봅시다.
경계에서서 내가 내 주인으로 살때 느끼는 자족감 느껴보자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될 두가지
1.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2.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 자기를 이삿짐같이 생각하기 때문임.
1. 내적 자발성에서 생산되는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2. 자기 밖에 이미생산된 기준에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나.
스스로를 비하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이념. 기준은 조백(찌꺼기 이다)
찌꺼기에 빗대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지해하는 보편적 이념 기준은 시간이 지나서 가공물이다.
욕망의 담당자로 경계에 서있는 주체로 자신을 돌아보자
그 자신은 여러분들 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자유롭다
이렇게 강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자기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소홀히 관리되지 않은 자기는 자기한테 가장 존엄한 존재이다.
존재는 존엄한 활동을한다.
뇌물이 거절할 수 있게 된다.
윤리 규정을 지키는 자기는 뇌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자기 존엄을 지키는 주체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
스티브잡스는 '죽음' 은 '생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인지시켜주며, '특정 세계관에 정착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인간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의 경쟁우위는 바로 위와 같은 논리에서 기인된다. 이미 탄탄하게 기반이 다져진 대기업의 경우, '죽음' 이라는 현상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삼성, LG 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반대로 스타트업 회사의 경우, 계속되는 경쟁때문에 매순간순간이 치열한 죽음의 전투일 것이다.(수입이 제대로 나지 않을 경우, 직원들 월 급걱정하랴, 사무실 임대로 걱정하랴, 아이디어 걱정하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스티브잡스가 말한것과 같이 이렇게 '죽음' (회사로 빗대면 '사업실패')이라는 현상에 대해 경각심을 제대로 느끼는 '스타트업' 이야 말로, 혁신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굉장한 통창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큰 기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이 고착되는 본성을 극복하지 않는한, 젋은 회사들, 그리고 젊은 이들이 혁신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존재할것이라 생각합니다"
2. 스타트업의 원동력, 신념, 그리고 인내력
이어 스티브잡스는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식당 종업원이든 어디든 취업한 뒤, 니가 진정 열정을 느끼는게 뭔지 먼저 찾는게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당히 고달픈 길이다.
나는 확신한다. 성공적인 기업가와 그렇지 않은 기업가를 가르는 절반정도는 극한의 인내력이라고"
사업이라게 쉬운일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스티브잡스 조차 사업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말할 정도면 글쎄 얼마나 힘든 일일지 솔직히 가늠되지 않는다.
절대 변하지 않을, 눈감눈 순간까지 지키려고 하는 '신념', 그리고 '인내력' 이 없는한, 유지될 수 없을 거라고 스티브잡스는 말한다.
그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하루하루를 인생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살아라. 어느날 그 생각은 분면 옳을 것이다"
그는 저 문장과 같이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오늘도 스티브잡스에게 쓴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반성해 본다.
1. 골든 서클의 비밀
아래보이는 골든 서클(Golded circle) 을 중심으로 보통사람과 영감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 혹은 조직은 아래의 골든 서클(Golden circle)에서 밖에서 안으로 소통한다.
즉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방식, 소통하는 방법이 what -> how -> why 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WHAT : 여기 새로운 법률 회사가 있습니다.
HOW : 저희는 최고의 변호사와 수많은 의뢰인이 있습니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WHY :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what) 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how)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왜(why)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서 '왜' 라고 할때, '이득을 얻기 위해' 라는 대답이 나올수는 없다. 그것은 결과물이다. 언제나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서 정확한 '왜'는 "목적이 무엇인가" "명분이 무엇인가" "자신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2. WHY 의 중요성
왜 당신은 이 일을 합니까?
왜 당신의 단체가 존재하는 겁니까?
이에 대해 명확히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영감이 있는 지도자들이나 단체는 크기나 분야에 관계없이 모두가 why -> how -> what 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소통한다.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영감을 주는 지도자나 단체는 (애플사, 마틴 루터킹 목사, 라이트형재)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소통한다.
다시 애플을 예로 들면
why
우리는 모든것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에 도전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믿음을 가집니다.
how
현재의 상태에 도전하는 방법은 저희의 물건을 아릅답게 디자인하는것 입니다.
사용하기 간단하고, 사용자에게 친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what
저희가 대단한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것보다는 물건은 만든 이유를 구매한다.
목표는 우리가 가진것을 사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는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 사람들과 사업을 하는 것이다.
3. 일상생활에서 "골든서클"을 경험하다.
최근 출장을 가게되면서 토즈 라는 스터디공간에서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정문에 적혀 있는 '토즈'의 사명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꿈과 비전, 목적과 가치 실현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토즈의 고객님들,
이른 시간에 함께 모여 회의, 스터디에 참여하시는 모습에 저희는 매일매일 감동합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우리가 그 분들의 노력을 존중하고, 그 분들의 성공을 돕기 위해 무엇을 서비스 해야하는지를
1997년, 수년간 적자를 기록하며 거의 파산 위기에 처한 애플은 넥스트(Next)를 인수하면서 그들이 과거에 내쫓아낸 스티브잡스를 복귀시켰다. 스티브잡스가 복귀 후 가장 먼저 한 일들중 하나는 애플의 브랜드 가치를 복귀시키는 것이었고,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시킨다.
본 애플사 내부 영상에서 반바지 차림의 잡스는 애플 직원들과 운영진들에게 마케팅의 본질, 애플이 상징하는 의미와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그런 후 그는 그와 그가 새로 고용한 광고 대행사가 몇주간 작업한 새로운 마케팅 캠페인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광고계의 전설이 된 '다르게 생각하라' 광고 캠페인이다.
우리 고객은 알기 원한다. 애플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 세상 어디에 속해 있는가?
우린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사람들이 보다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사람들, 자신이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자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캠페인의 주제는 '다르게 생각하라' 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여 이 세상을 진보시킨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이 회사의 영적 정체성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세상에 선언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세상에 진출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것이 우리를 상징한다'
애플이 왜 다른 기업과 다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동영상이 아닐까 싶다. 여타 다른 광고들 처럼 제품홍보에 집중하는 평범한 광고가 아닌, 자사의 정체성, 신념을 알리는 혁신적인 광고와 스티브잡스의 언변,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다. 나 역시 애플의 광고에서 표현했던 것과 같이, 세상은 다르게 '생각하는 미친자'에 의하여 혁신된다는 표현에 격하게 공감한다.
결국 스티브잡스 역시 본인이 생전에 동경하던 '다르게 생각하던 미친자' 가 되어 세상을 바꾸게 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으면 세상은 얼마나 더 혁신적으로 변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