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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대학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그만큼 인명피해 역시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오늘 정리 할 아르메니아 역시 '아제르바이잔'이란 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대학살
오스만투르크 제국(현재 터키)이 아나툴리아 동부에서 거주하는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두 차례(1894~94, 1915~16)에 걸쳐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살해사건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대다수이나, 터키 정부에서는 이를 강제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집단살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또는 아나톨리아 집단학살 이라고 불려진다.



발단
1894~94
19세기 말,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며 남카프카스를 점령하자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의 북동부까지 점령한 것이 대규모 학살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계기로 독립을 희망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를 지지하며 1894년 오스만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이슬람주의자와 기독교계인 아르메니아인 간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이뤄졌다.

1915~16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였고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3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협상 간의 대치구도가 형성되었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가 속한 연합국에 맞서기 위해 3국동맹에 가담하였다. 이때 러시아 접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혁명세력이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고 1915년 영국군이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고, 곧 콘스탄티노플마저도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터키 정부는 아나톨리아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을 그들의 집단거주지에서 터키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전쟁 중인 자신들의 뒤에서 독립을 위해 봉기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차도 연결되지 않은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추위와 기아, 질병, 강제노동 등으로 쓰러져갔다. 살아남은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도 이라크∙시리아∙팔레스타인 등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제노사이드 [ genocide ]
국제 사회에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제노사이드와 연관짓곤 한다. 제노사이드는 유대인 출신의 폴란드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처음 제시하였고, 이는 1948년 유엔협약을 통하여 국제적 인정과 동의를 얻게 되었다. 이 협약은 제노사이드를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으로 구성된 주민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몰살시키고자 시도하는 행위" 로 정의하였고, 인종학살과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행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거나 악의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각 국가와 학자의 입장에 따라 희생자 집단의 성격, 살해의 의도와 범위 등에 대한 판단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도드라짐으로써 국가간 이견충돌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리고 갈등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1923년 터키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터키 정부는 이 사건을 오스만제국을 침공한 러시아군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아르메니아인 전투원이나 스파이들의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때의 희생자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인 것은 전시 상황에서 최전선의 혼란으로 인한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수에 대한 견해차이도 존재한다. 터키 측은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유럽∙일본 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60만명에서 80만 명 정도라는 견해를 내놓고있다.

2006년 프랑스 하원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며 이를 부인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안을 절대 다수의 지지 속에 통과시켰다. 이에 터키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국의 국제입찰에 프랑스 기업의 참여를 배제하고, 이슬람인들에게 프랑스 제품의 불매운동을 호소는 등의 반 프랑스 행보를 벌이고 있다.
참고로 프랑스는 홀로코스트의 공개적 부정을 처벌하는 법안을 1990년 통과시켰고, 2001년 유럽의 노예제를 '반인률 범죄'로 인정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바 있다. 


참조 사이트
  • 이미지1 출처 -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973121&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1967_000_1%2F20120502102150747_JBUTBIHDN.jpg%2Fba2_2-2-230_i1.jpg%3Ftype%3Dm4500_4500_fst_n%26wm%3DY&cid=43667&categoryId=43667
  • 이미지2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1112.html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1112.htm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28631&cid=50299&categoryId=50299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A9%94%EB%8B%88%EC%95%84_%EC%A7%91%EB%8B%A8%EC%82%B4%ED%95%B4#.ED.94.BC.ED.95.B4.EC.9E.90_.EC.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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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는 절체절명의 기회


지금은 정체되어 있지만 한때 세계의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당시 일본은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는지와 세계 정세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빌미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애초에 영국은 아시아에서 독일 무장 상선을 수색하는 것에 한정해서 일본의 참전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뛰어넘어 전면 참전을 강행했다.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이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독일의 식민지이던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했다. 이때 중국은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사항'을 강제하여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 다음으로 유럽의 전쟁으로 특수를 만끽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경제 불황과 재정위기를 한 번에 떨쳐내었다. 전쟁 전(1914년) 11억엔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전쟁후(1920년) 28억엔의 채권국이 되었다. (28억엔이면 당시 조선의 GDP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 전쟁중이던 유럽 상품을 대신하여 면직물 등의 일본상품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은 압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선박의 부족사태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운업∙조선업은 공전의 호황을 누리게 되고 일본은 세계 제3위의 해운국이 되었다.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사업 등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면서 1차대전 이후 비로서 처음으로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앞지르게 되었다. 또 유럽으로 대량의 군수품을 팔게 되면서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나리킨(벼락부자)들이 속출하면서 나리킨의 전성시대가 된다.

한편 전쟁에 의한 호황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모순은 심화되어 갔다.


참고 사이트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091&cid=42998&categoryId=42998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alsn76/22056279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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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기독교의 동서 분열 -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종교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한번 정리할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을 말한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유는 교리, 정치,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우상 숭배 논쟁, 삼위일체 논쟁, 교권싸움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입에 못이겨 일찍 망하게 되었고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오랫동안 건재했다.
<그림1, 동서로 분리된 로마 제국의 영토 모습>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리는 -  '동서방 교회 대분열' -  당시 양측의 갈등은 매우 해묵은 문제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기 전인 4세기 경부터 기독교의 주요 교구는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등 제국 내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섯 개가 있었다. 로마만 서방에 있고 나머지 4개는 동쪽에 있는 동방 교회였다. 동부 지역은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과 가까운 만큼 기독교 세력이 서방에 비해 훨씬 컸다. 그런데도 로마 교구는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예수의 첫째 제자인 베드로가 순교한 점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다른 교구에 비해 우월권을 주장했다. 또한 로마 교회 주교는 다른 교구의 주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점차 교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84년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을 하면서 동서 교회의 반목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진 동서교회는 11세기 중반에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054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던 로마교회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교주에게 파문장을 던지는 돌발적인 행동을 벌이고 만것이다. 그리고는 이틀 뒤 황제의 허가를 얻어 황제가 선사한 선물을 지닌채 귀환했다. 여기에 맞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로마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고 정통 기독교인 동방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로마 기독교의 분열이 공식화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동서 교회은 서로의 파문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곧 원만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결되기 전에 동로마에 여러가지 시련이 닥치는 바람에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면서 동서 교회 분리가 영구화되고 말았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싸우는 사이 외부의 여러 적들이 동로마 영토로 쳐들어오면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분열이 생기게 되었을까.

우상 숭배 논쟁
초기에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어떤 성상도 허락하지 않았던 서로마는 외세의 침략으로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로인해 서로마는 게르만 민족의 종교 풍습인 우상 숭배를 받아들여 게르만 세력을 포섭하는 선택을 하였다. 이는 동방 교회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

삼위 일체 논쟁, 혹은 단성론
서방교회는 신성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예수는 단지 전달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단성론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교권 싸움
바로 교권싸움이다.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권이 점점 강해지면서 세계를 압도하였고 이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동로마 대 주교가 굴복하지 않고 결국 분립하게 된것이다. 두 교권은 교회의 수위권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교리 문제(단성론이나 성상 숭배 문제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대립하게 되었고 11세기 중반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성상 숭배
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 측에서는 무지한 야만인들에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치기 위해서 성상숭배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여 비잔틴 제국 측의 성상 숭배 명령을 묵살하였다. 결국 1054년 7월 16일에 동서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게 되었다.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었다.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기 비난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에 화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사실상 초기 서로마는 명백이 끊겼고, 신성 로마제국이란 다른 이름이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유럽에서 크게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정교,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교로 나뉘어졌다. 이 후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사회에서 고립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동서분열' 논쟁은 11세기에 단일 기독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서로마)가 이탈했다는 시각과, 교황과의 일치로부터 동방 정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참고 문헌>
-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
-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4%9C_%EB%B6%84%EC%97%B4
-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 곽영완
- 그림 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lee96&logNo=220486921714&parentCategoryNo=&categoryNo=22&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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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마그나 카르타 / 권리청원 / 권리장전

영국에서 발생한 마그나 카르타 / 권리 청원 / 권리 장전은 헌정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의회 제정법이다. 이와 같은 역사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영국이 선진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훗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그들의 역사에 깊게 감탄을 표한다. (물론 영국이라는 선진국을 일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옹호 것은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적 요소는 없다.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의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권리 청원
1628년에 영국의회가 찰스 1세의 승인을 얻은 국민의 인권에 관한 선언으로 권리장전이 명예혁명의 결과에 의한 인권선언의 성격을 띤 데 반해, 권리청원은 청교도 혁명과 관련된 인권선언이다.

찰스 1세는 왕위를 계승한 이래 프랑스, 에스파냐와의 잦은 전쟁으로 그 비용을 강제기부나 상납금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국내 불만은 갈수록 고조되었고,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코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에게 청원하는 형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리선언을 한 것이다. 

주 내용은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과세나 공채도 강제되지 않는다는 것,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는 것, 각종 자유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특별세 승인을 필요로 한 찰스 1세는 마지못해 재가했으나, 1629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정치를 단행하여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권리 장전
청교도 혁명 왕정복고하여 즉위한 찰스 2세는 즉위가 없었다. 찰스의 동생 요크 공 제임스가 주목받고 있었다. 제임스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영국은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가 국교인 상황이었다. 다수의 시민들은 로마 가톨릭을 심봉하는 국왕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결국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제임스는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치를 감행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쫓겨나고,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인 신교도 오렌지 공 윌리엄을 공동 추대했다. 1689년에 영국 의회는 윌리엄 3세에게 즉위의 조건으로 권리장전을 승인시킨다. 왕이 의회의 승인없이 법의 정지·과세·군대의 징모 등을 하지 않을 것, 의회의 자유 승인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영국 의회정치 확립의 기초가 된 이러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후에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왕 제임스 2세는 자신이 등용했던 사악한 몇몇 고문관과 재판관과 각료의 조언을 받아들여, 신교와 우리나라의 법률과 자유를 파괴하고 말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중략)
5. 모든 신민은 국왕에게 청원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청원 사실을 구실로 삼아 수감하고 기소하는 조치는 불법이다.
6. 의회의 동의 없이 평화시에 국내에서 상비군을 징집하고 유지하는 조치는 불법이다.
- 권리장전 중

내용을 정리하고 생긴 궁금증은 "권리 청원과 권리장전 내용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 권리청원이란, '국왕을 상대로하여 권리를 주장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청원제도' 이다.
- 권리 장전이란, '국왕이나 정부가 국민이나 의회 등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전'을 말한다.
- 청원은 언제까지나 청원일 수밖에 없고, 권리장전을 통해 실제 법이 제정되고 공표될 수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A%B7%B8%EB%82%98_%EC%B9%B4%EB%A5%B4%ED%83%80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35&cid=47336&categoryId=47336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8130&cid=40942&categoryId=31720
- http://cafe.naver.com/lcjcc/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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