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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대학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그만큼 인명피해 역시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오늘 정리 할 아르메니아 역시 '아제르바이잔'이란 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대학살
오스만투르크 제국(현재 터키)이 아나툴리아 동부에서 거주하는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두 차례(1894~94, 1915~16)에 걸쳐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살해사건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대다수이나, 터키 정부에서는 이를 강제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집단살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또는 아나톨리아 집단학살 이라고 불려진다.



발단
1894~94
19세기 말,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며 남카프카스를 점령하자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의 북동부까지 점령한 것이 대규모 학살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계기로 독립을 희망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를 지지하며 1894년 오스만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이슬람주의자와 기독교계인 아르메니아인 간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이뤄졌다.

1915~16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였고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3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협상 간의 대치구도가 형성되었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가 속한 연합국에 맞서기 위해 3국동맹에 가담하였다. 이때 러시아 접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혁명세력이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고 1915년 영국군이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고, 곧 콘스탄티노플마저도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터키 정부는 아나톨리아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을 그들의 집단거주지에서 터키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전쟁 중인 자신들의 뒤에서 독립을 위해 봉기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차도 연결되지 않은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추위와 기아, 질병, 강제노동 등으로 쓰러져갔다. 살아남은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도 이라크∙시리아∙팔레스타인 등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제노사이드 [ genocide ]
국제 사회에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제노사이드와 연관짓곤 한다. 제노사이드는 유대인 출신의 폴란드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처음 제시하였고, 이는 1948년 유엔협약을 통하여 국제적 인정과 동의를 얻게 되었다. 이 협약은 제노사이드를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으로 구성된 주민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몰살시키고자 시도하는 행위" 로 정의하였고, 인종학살과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행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거나 악의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각 국가와 학자의 입장에 따라 희생자 집단의 성격, 살해의 의도와 범위 등에 대한 판단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도드라짐으로써 국가간 이견충돌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리고 갈등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1923년 터키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터키 정부는 이 사건을 오스만제국을 침공한 러시아군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아르메니아인 전투원이나 스파이들의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때의 희생자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인 것은 전시 상황에서 최전선의 혼란으로 인한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수에 대한 견해차이도 존재한다. 터키 측은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유럽∙일본 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60만명에서 80만 명 정도라는 견해를 내놓고있다.

2006년 프랑스 하원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며 이를 부인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안을 절대 다수의 지지 속에 통과시켰다. 이에 터키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국의 국제입찰에 프랑스 기업의 참여를 배제하고, 이슬람인들에게 프랑스 제품의 불매운동을 호소는 등의 반 프랑스 행보를 벌이고 있다.
참고로 프랑스는 홀로코스트의 공개적 부정을 처벌하는 법안을 1990년 통과시켰고, 2001년 유럽의 노예제를 '반인률 범죄'로 인정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바 있다. 


참조 사이트
  • 이미지1 출처 -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973121&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1967_000_1%2F20120502102150747_JBUTBIHDN.jpg%2Fba2_2-2-230_i1.jpg%3Ftype%3Dm4500_4500_fst_n%26wm%3DY&cid=43667&categoryId=43667
  • 이미지2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1112.html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1112.htm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28631&cid=50299&categoryId=50299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A9%94%EB%8B%88%EC%95%84_%EC%A7%91%EB%8B%A8%EC%82%B4%ED%95%B4#.ED.94.BC.ED.95.B4.EC.9E.90_.EC.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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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는 절체절명의 기회


지금은 정체되어 있지만 한때 세계의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당시 일본은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는지와 세계 정세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빌미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애초에 영국은 아시아에서 독일 무장 상선을 수색하는 것에 한정해서 일본의 참전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뛰어넘어 전면 참전을 강행했다.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이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독일의 식민지이던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했다. 이때 중국은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사항'을 강제하여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 다음으로 유럽의 전쟁으로 특수를 만끽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경제 불황과 재정위기를 한 번에 떨쳐내었다. 전쟁 전(1914년) 11억엔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전쟁후(1920년) 28억엔의 채권국이 되었다. (28억엔이면 당시 조선의 GDP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 전쟁중이던 유럽 상품을 대신하여 면직물 등의 일본상품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은 압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선박의 부족사태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운업∙조선업은 공전의 호황을 누리게 되고 일본은 세계 제3위의 해운국이 되었다.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사업 등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면서 1차대전 이후 비로서 처음으로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앞지르게 되었다. 또 유럽으로 대량의 군수품을 팔게 되면서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나리킨(벼락부자)들이 속출하면서 나리킨의 전성시대가 된다.

한편 전쟁에 의한 호황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모순은 심화되어 갔다.


참고 사이트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091&cid=42998&categoryId=42998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alsn76/22056279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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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기독교의 동서 분열 -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종교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한번 정리할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을 말한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유는 교리, 정치,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우상 숭배 논쟁, 삼위일체 논쟁, 교권싸움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입에 못이겨 일찍 망하게 되었고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오랫동안 건재했다.
<그림1, 동서로 분리된 로마 제국의 영토 모습>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리는 -  '동서방 교회 대분열' -  당시 양측의 갈등은 매우 해묵은 문제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기 전인 4세기 경부터 기독교의 주요 교구는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등 제국 내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섯 개가 있었다. 로마만 서방에 있고 나머지 4개는 동쪽에 있는 동방 교회였다. 동부 지역은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과 가까운 만큼 기독교 세력이 서방에 비해 훨씬 컸다. 그런데도 로마 교구는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예수의 첫째 제자인 베드로가 순교한 점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다른 교구에 비해 우월권을 주장했다. 또한 로마 교회 주교는 다른 교구의 주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점차 교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84년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을 하면서 동서 교회의 반목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진 동서교회는 11세기 중반에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054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던 로마교회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교주에게 파문장을 던지는 돌발적인 행동을 벌이고 만것이다. 그리고는 이틀 뒤 황제의 허가를 얻어 황제가 선사한 선물을 지닌채 귀환했다. 여기에 맞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로마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고 정통 기독교인 동방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로마 기독교의 분열이 공식화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동서 교회은 서로의 파문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곧 원만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결되기 전에 동로마에 여러가지 시련이 닥치는 바람에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면서 동서 교회 분리가 영구화되고 말았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싸우는 사이 외부의 여러 적들이 동로마 영토로 쳐들어오면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분열이 생기게 되었을까.

우상 숭배 논쟁
초기에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어떤 성상도 허락하지 않았던 서로마는 외세의 침략으로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로인해 서로마는 게르만 민족의 종교 풍습인 우상 숭배를 받아들여 게르만 세력을 포섭하는 선택을 하였다. 이는 동방 교회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

삼위 일체 논쟁, 혹은 단성론
서방교회는 신성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예수는 단지 전달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단성론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교권 싸움
바로 교권싸움이다.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권이 점점 강해지면서 세계를 압도하였고 이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동로마 대 주교가 굴복하지 않고 결국 분립하게 된것이다. 두 교권은 교회의 수위권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교리 문제(단성론이나 성상 숭배 문제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대립하게 되었고 11세기 중반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성상 숭배
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 측에서는 무지한 야만인들에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치기 위해서 성상숭배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여 비잔틴 제국 측의 성상 숭배 명령을 묵살하였다. 결국 1054년 7월 16일에 동서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게 되었다.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었다.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기 비난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에 화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사실상 초기 서로마는 명백이 끊겼고, 신성 로마제국이란 다른 이름이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유럽에서 크게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정교,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교로 나뉘어졌다. 이 후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사회에서 고립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동서분열' 논쟁은 11세기에 단일 기독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서로마)가 이탈했다는 시각과, 교황과의 일치로부터 동방 정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참고 문헌>
-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
-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4%9C_%EB%B6%84%EC%97%B4
-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 곽영완
- 그림 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lee96&logNo=220486921714&parentCategoryNo=&categoryNo=22&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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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마그나 카르타 / 권리청원 / 권리장전

영국에서 발생한 마그나 카르타 / 권리 청원 / 권리 장전은 헌정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의회 제정법이다. 이와 같은 역사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영국이 선진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훗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그들의 역사에 깊게 감탄을 표한다. (물론 영국이라는 선진국을 일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옹호 것은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적 요소는 없다.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의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권리 청원
1628년에 영국의회가 찰스 1세의 승인을 얻은 국민의 인권에 관한 선언으로 권리장전이 명예혁명의 결과에 의한 인권선언의 성격을 띤 데 반해, 권리청원은 청교도 혁명과 관련된 인권선언이다.

찰스 1세는 왕위를 계승한 이래 프랑스, 에스파냐와의 잦은 전쟁으로 그 비용을 강제기부나 상납금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국내 불만은 갈수록 고조되었고,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코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에게 청원하는 형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리선언을 한 것이다. 

주 내용은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과세나 공채도 강제되지 않는다는 것,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는 것, 각종 자유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특별세 승인을 필요로 한 찰스 1세는 마지못해 재가했으나, 1629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정치를 단행하여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권리 장전
청교도 혁명 왕정복고하여 즉위한 찰스 2세는 즉위가 없었다. 찰스의 동생 요크 공 제임스가 주목받고 있었다. 제임스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영국은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가 국교인 상황이었다. 다수의 시민들은 로마 가톨릭을 심봉하는 국왕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결국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제임스는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치를 감행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쫓겨나고,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인 신교도 오렌지 공 윌리엄을 공동 추대했다. 1689년에 영국 의회는 윌리엄 3세에게 즉위의 조건으로 권리장전을 승인시킨다. 왕이 의회의 승인없이 법의 정지·과세·군대의 징모 등을 하지 않을 것, 의회의 자유 승인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영국 의회정치 확립의 기초가 된 이러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후에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왕 제임스 2세는 자신이 등용했던 사악한 몇몇 고문관과 재판관과 각료의 조언을 받아들여, 신교와 우리나라의 법률과 자유를 파괴하고 말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중략)
5. 모든 신민은 국왕에게 청원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청원 사실을 구실로 삼아 수감하고 기소하는 조치는 불법이다.
6. 의회의 동의 없이 평화시에 국내에서 상비군을 징집하고 유지하는 조치는 불법이다.
- 권리장전 중

내용을 정리하고 생긴 궁금증은 "권리 청원과 권리장전 내용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 권리청원이란, '국왕을 상대로하여 권리를 주장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청원제도' 이다.
- 권리 장전이란, '국왕이나 정부가 국민이나 의회 등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전'을 말한다.
- 청원은 언제까지나 청원일 수밖에 없고, 권리장전을 통해 실제 법이 제정되고 공표될 수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A%B7%B8%EB%82%98_%EC%B9%B4%EB%A5%B4%ED%83%80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35&cid=47336&categoryId=47336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8130&cid=40942&categoryId=31720
- http://cafe.naver.com/lcjcc/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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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사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번쯤 매체를 통해 접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왜 그리 싸우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상 분쟁보다도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힘없는 팔레스타인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나의 글을 통해 이 분쟁의 해결에 그리고 팔레스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겠다.

- 현재 상황 - 
현재 대부분의 국토를 이스라엘에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은 '가자 지구' '웨스트 뱅크(서안 지구)'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아래 사진 참고) 자치 정부를 꾸리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 기반이 없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부분 의존하여 연명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으로 인해 '하늘에 뚫린 거대 감옥' 속에서 힘들게 생활 하고 있다.
출처 : http://goo.gl/cZQ2Kz

'가자 지구' 와 '웨스트 뱅크' 는 각각 다른 정당이 이끌고 있다. '웨스트 뱅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의견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계열 정당'의 파타(PATAH)가 이끌고 있으며, '가자 지구'는 3 NO ( No recognition, No peace, No negotiation) 를 주장하는 하마스(HAMAS)가 정당을 이끌고 있다. 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하마스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이들을 지지하는 다른 나라들과도 충돌을 하고 있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 분쟁 발단 -
약 3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에게해 지역에서 온 이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모세가 이끄는 유대 민족이 이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한 후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기원후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 후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아낸 로마가 무너지자 아랍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땅에 들어와 살게되었다.

1800년대 후반 즈음,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대 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시온주의라고 한다. (시온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에 있는 언덕을 가리킨다.) 제1차 세계 대전 즈음에 심해진 박해 때문에 시오니즘은 점차 유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가나안(팔레스타인) 지역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되어 분해되었고, 이 후 영국이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지역을 위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의 약속을 하였다. 아랍인들에게는 영국군을 지원하여 싸워주면 독립 국가를 세우게 도와주겠다는 약속하였고 - '맥마흔 선언', 유대민족에게는 금전적, 과학적인 원조에 대한 대가로 이스라엘에 유대인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 '밸푸어 선언'. (폭약 제조 과학자 '바이츠만'이 영국 외무상인 '제임스 밸푸어'에 직접적으로 독립국가를 요구했다고 한다.) 중요한건 밸푸어 선언은 아랍의 독립 국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맥마흔 선언에 명백히 위배되는 모순된 선언이라는 것이다. 

폐하의 정보는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본거지를 팔레스타인에 수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제임스 밸푸어 ,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밸푸어 선언으로 인해 두번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세계 각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의 대량 이주를 불러 왔으며, 반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되도록 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세계 곳곳에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차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시오니즘에 대하여 합법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과의 분쟁이 점차 확산되자 이 문제를 UN에게 상정하였다.

1947년 11월 29일 제 2차 UN 안보리 총회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승인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때 UN이 제의한 것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이다. 이에 팔레스타인은 연방안을 제안하였다. 연방안은 팔레스타인 연방제 안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각각 민족, 정치적 자치를 하도록 하는 방법이고 분할안은 말그대로 토지를 분할하자는 것이다. 보다 현실적이었던 연방안은 강대국 주도의 분할안이 유대인의 로비를 받은 미국의 주도하에 통과되면서 무산되었다.

분할안에 따라 팔레스타인은 아랍과 유대로 반분되었고, 인구나 보유 토지 비중이 현저히 낮은 유대인이 유리한 지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하게 된 아랍인들이 반미정서를 강하게 가지게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유대인의 토지는 6.6% 정도였으나 분할되고 나서는 팔레스타인 전체 토지의 56%를 차지하고 아랍인은 44%을 차지하게 되었다.)

- 이스라엘 국가 수립 결정 - 
결국 국가 수립이 결정되고 땅까지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가 된 땅에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2천년 동안 살던 땅을, UN의 결정으로 그리고 불합리한 조건의 안건의 통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받아들이고, 세금을 내고, 체제 안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든 선택하여야만 했다. 유대인은 이들이 쉽사리 떠나지 않자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시온주의자들의 테러와 학살 -
이르군 (Irgun)과 레히 (Lehi) 라는 유대폭력 조직들이 주도해서 극단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른바 디 (D) 플랜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들은 마을 단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48년 4월 9일, 독립 한 달 전에 자행한 데이르 야신(Deir Yassin) 마을 학살 사건이다.

144가구 마을 전체 인구가 400여 명인데, 그날 밤 마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던 주민 256명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졸지에 닥친 살육에 도망 못 간 아이들과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확인 사살을 하고, 집에는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초토화시켰다. 하룻밤 사이에 마을 하나가 완전히 도륙당한 셈이다. 새벽에 시작된 살육 행진은 정오경에 모두 끝이 났다.
- 이슬람학교2, 이희수
한달 사이에 20여 개의 오아시스 마을들이 이런식으로 사라졌다. 효과는 확실했다. 400여개의 마을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이 레바논과 시리아로 도망갔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난민의 시작이다.

- 이스라엘 독립선언, 그리고 중동 전쟁 -
벨푸어 선언 30년 후, 유대인은 결국 기존에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수많은 아랍인들을 힘과 폭력으로 쫓아내고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아랍은 하나의 민족 공동체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사게되고, 결국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 군대가 동원되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였다. UN의 휴전결의 채택으로 전쟁은 중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80% 를 확보하게 되었다. 뒤이어 발생한 2,3,4 중동전쟁 역시 아랍인들이 패배하면서 이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가 기반되어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랍인들은 서구에 대하여 원한을 품게 되었다. 또한 수십 년 동안에 걸친 유혈사태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되는 사태의 발발을 기원했다. 2천 년동안 조상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 민족은 이제 나라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불쌍한 민족이 되어버렸다. 아랍권의 붕괴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도와주지 않는 '국제 고아'가 되고 말았다.

조지 안토니우스는 '아랍의 각성' 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망각하는 날이 온다면 인류 문명의 종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아왔던 다른 민족에게 그 죄과를 전가시키는 또 다른 나치 학살극을 행하는 것은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인류의 비극이다.





<참조문헌>
-  https://ko.wikipedia.org/wiki/%EB%B0%B8%ED%91%B8%EC%96%B4_%EC%84%A0%EC%96%B8
- 뉴스스퀘어, http://www.newsquare.kr/issues/232
- http://blog.naver.com/kbs4547/220297661315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294&cid=43667&categoryId=43667
- 이슬람 학교1,2, 이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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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인도 카스트제도

12억 인구의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스트제도' 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스트제도는 인도에서 수년천 동안 유지되는 계급제도이다. 세밀히 공부하면 할 수록 카스트제도는 없어져야 할 끔찍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카스트 제도는 무엇인가?

카스트 제도는 세계의 수 많은 전근대 사회에서 나타났던 문화∙사회적 현상으로, 일정 신분계층 집단의 지위를 자손 대대로 세습하도록 하는 제도다. 신분의 분류는 주로 집단의 경제력, 정치적 권력, 사회 문화에 기인되어 이루어진다. 특별한 정변이 일어나거나 개인적 능력이 매우 우수하지 않는 한 계층이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도에서는 1947년 법적으로 카스트제도를 금지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은 카스트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놀라운건 인도 뿐만 아니라 다른 일부 국가에서도 카스트제도의 풍습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수가 대략 2억 50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 인도 및 다른지역의 카스트 제도 확인 )

인도라는 나라는 카스트제도를 통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6000년 전 카스트제를 적용한 이후, 현대에 이르면서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병이 되었다. 인도의 카스트 계급은 아래와 같이 4개의 계층으로 분류된다.

계층 명칭
종사 직업
사회적 업무
브라만
성직자학자승려 등
사회인의 교육과 힌두교의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일
크샤르티아
무사군인 경찰관 등
사회 제도와 안보를 유지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일
바이샤
상인수공업자연예인 등
생산 활동과 관련된 일
수드라
농민노동자 등
육체 노동과 관련된 일

천민 계급인 수드라는 다시 수많은 계급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바로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다. 이들은 악마, 악귀 등 사회악으로 취급받으며 보통 힘든 일을 하거나 가축을 다루는 일, 시체를 다루는 일, 구식 화장실의 변을 정리하는 일 등의 더러운 일을 하기도 한다.

또한 불가촉천민는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격리 수용된다. 사는 지역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들이 사용하는 우물조차 격리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계급들과 같은 우물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 우물을 길러야 한다. 만약 이들과 다른 계층인들과 신체적 접촉이 발생할 경우(심지어는 인도의 4대 카스트 중 최하위라는 수드라와 신체적으로 접촉해도 마찬가지) 큰 죄로 다스리게 되고 심지어 이 사유로 이들을 죽일 수도 있다.

2. 인도 카스트제도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었나?

BC1000 년 경 유목민이 었던 아리아인들이 철기를 내세우며 겐자스 강 유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복전쟁을 통해 기존 인도북구에서 생활하던 원주민(드라비다인) 들은 아리아인들에게 지배당했다. 아리아인들은 키가 크고, 눈이크고, 피부는 비교적 희고, 비교적 균형잡힌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들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자칭하는 등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우월주의는 곧 정복전쟁을 통한 우월성의 증명으로 발전했고 인도전역은 아리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아리아인들이 다수의 드라비다인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계급제도 즉 카스트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원주민들과 혼혈 뿐 아니라 식사하는 것까지 금하고자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제도화 시키게 되었다.
다른 목적으로는 분업이다. 즉 성직자, 무사, 경찰관 등 각각의 일을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맡아서 하게끔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카스트인 사람들끼리 결혼하게 한 것도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결혼하였을때 서로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더 큰 시너지 효과가 나올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목적으로 시작했던 카스트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뜻이 변질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3. 왜 카스트제도는 붕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되는가?

카스트제도는 오랜 세월 동안 인도인들의 삶에 뿌리 깊게 자리매김해왔다. 카스트가 이렇게 오랜 세월 인도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현생에서 충실히 선을 쌓고 최선을 다해야 다음 생에 더 나은 신분으로 태어난다' 는 힌두교의 교리 (윤회사상) 때문으로 해석된다. 반대로 '내가 지금 이 계급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전생에서 내가 이 계급으로 태어날 만큼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이 삶에서 충실하고 이 계급에 맞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다음 생에 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 살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카스트 제도로 차별을 받는 사람도, 차별을 하는 사람도 이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 경제 측면에서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상층 카스트들이 하층 카스트에 대해 고려하는 비교우위 역시 카스트제도의 붕괴를 지연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4. 인도는 현재 어떤 모습인가?

인도에서는 심각한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최우선의 가치로 여겼던 신분을 내려서라도 취업과 경제적 지원을 받겠다는 시위가 벌어진 만큼 시장논리와 자본주의가 카스트 제도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

최근 인도 정부는 카스트 제도의 중간 계급에 속하는 카트 카스트 계급 주민들이 정부의 하층 카스트 우대 정책에 항의해 시위를 일으켰다. 공무원 임용과 대학생 선발 등에서 50%의 인원을 하층 계급에 할당하는 정부 정책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참고 문헌>
-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3223004.html
- http://kiss7.tistory.com/446
-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C%8A%A4%ED%8A%B8
- http://blog.naver.com/unckor/4020148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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